영화 '색계' 줄거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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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색계' 줄거리, 리뷰

by 정겨운 시골집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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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계>는 주로 야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정사 장면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두 연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정사 장면의 강렬함보다 탕웨이의 겨드랑이털이 더 큰 충격이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줄거리

영화는 피난민 행렬에 있는 탕웨이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링난대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중일전쟁을 피하기 위해 홍콩으로 잠시 건너오게 된다. 당시 홍콩은 영국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탕웨이와 친구들은 극단을 만들어 애국심을 고취하는 연극을 상영했고,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던 중 이들은 친일파 양조위가 홍콩에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암살하기 위해 양조위의 가족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그는 매우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탕웨이는 양조위가 자신에게 사적인 호감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고, 친구들에게 미인계를 넌지시 제안한다.

그러나 이미 친구들은 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탕웨이가 이를 제안하기 전부터 그녀를 도구로써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으니, 탕웨이는 남자를 전혀 알지 못했다. 작전을 위해 그녀는 팀 멤버 중 한 사람과 침대에 눕게 된다. 원하지 않는 관계를 가진 것이다.

양조위가 상하이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작전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렇게 친구들은 저마다의 희생을 뒤로한 채 뿔뿔이 흩어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몇 년 후 탕웨이는 극단 친구 중 한 사람인 왕리홍과 재회한다. 그는 그녀에게 양조위를 제거하는 독립군의 작전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금 양조위를 만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져만 간다. 죽여야 할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감상 포인트

1. 성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영화 초반의 탕웨이는 상당히 청순하고 귀여운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미인계를 위해 원하지 않는 상대와 섹스를 한 순간부터 그녀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그러했다.

성은 사랑하는 사람과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유희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인류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성이 인간의 존엄과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과거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처녀성을 중시했던 것도, 몸을 파는 여성을 천시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영화에서의 성은 '도구'에 불과하다. 여자에게는 남자를 암살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남자에게는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첫 관계는 일방적이고 야만적이기만 하다. 남자는 욕구를 분출하고 여자는 이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도구로서의 성은 사랑 안에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색계>는 특별하다. 사랑과 관계의 순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사랑을 하고 관계를 갖지만, 이들은 관계를 갖고 사랑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다른 애로영화들과 구별되는 점은 여기에 있다.

2. 사랑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Lust Caution이라는 영어 제목을 확인할 수 있다. 직역하면 '성욕 조심'인데 사실 성욕보다는 '사랑을 조심해라'가 더 맞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조직의 목표를 위해 살아가던 이들에게 사랑이란 불필요한 감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국 이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조직과 자신의 관계가 흔들리게 된다.

사랑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조직과 자신이라는 선택지 중 항상 조직만을 택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마음의 결정을 따랐다. 물론 그 결과는 비참했지만,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때의 삶은 더 비참했을 것이다. 삶을 지속시키는 것은 머리이지만, 삶의 이유는 가슴에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조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조직에게 그들은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작전에 투입되기 전, 탕웨이는 독립군 간부에게 작전이 끝나면 자신을 영국으로 보내줄 것을 약속받았지만 정작 독립군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독립군 간부는 탕웨이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그녀가 영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태워버리기까지 한다.

양조위가 독립군의 표적이 된 것은 그가 정부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부에 대한 나름의 신념을 바탕으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라를 위한 일에 쏟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정부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정부는 그를 감시했고, 탕웨이가 그에게 접근했을 때에도 그 둘의 관계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양조위가 포섭되었을 것을 의심한 것이다.

양조위는 영화 내내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는다. 또한 탕웨이와 불륜을 저지를 때 그의 눈빛에서는 죄책감을 전혀 읽을 수 없다. 이는 그의 삶의 목적이 가정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도, 가족도 아닌 오직 조직을 위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조직은 그들을 위해주지 않았다.

단언컨대 그들의 인생에서 '진정한 관계'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둘의 관계가 유일했다. 그리고 사랑은 그들을 바꿔놓았다. 그들은 더 이상 삶을 조직을 위해서가 아닌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살게 된다. 그래서 탕웨이는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양조위를 살리는 선택을 한다. 아마 반대의 상황이었더라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비록 영화의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지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탕웨이는 친구들과는 달리 의연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는다. 자신의 선택이 초래한 죽음을 후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가슴이 향하는 곳에는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3. <색계>를 통해서 보는 유교적 관점 -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전한가?

서방의 많은 나라들에게 민주주의란 '국민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다. 프랑스가 지금까지도 혁명의 나라로 불리는 이유는 왕정의 몰락과 민주주의의 확립이 모두 국가 내부에서, 국민의 힘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선배 영국과 미국 역시도 외세의 개입 없이 모두 국민의 필요에 의해 민주정부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쩌다 보니' 민주국가가 된 나라다. 왕정은 일본이 무너뜨렸고, 일본이 사라진 자리에 미국이 들어와서 민주국가를 세워주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서민들의 수탈과 억압이 마치 일제강점기에만 있었던 것처럼 가르치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힘없는 백성들에게 일제강점기 50년과 조선왕조 500년은 모두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 지나친 세율, 일방적인 지시와 강요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으나, 분명한 것은 '일본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을 수탈을 욕하려면 조선왕조도 함께 욕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 교육은 이 모든 것을 지나치게 일본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는 자연히 일본에 대한 혐오를 만들어낸다.(필자의 경험이기도 하다.) 몇 년 전 범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반일운동을 보라. 유니클로 불매로 대표되는 일본산 제품 불매가 과연 이성적인 행동이었나. 그리고 수많은 일본 음식점들에서 '저희는 일본산 원자재가 아닌 100% 국내산만 사용합니다.'라는 문구를 써붙이게 만들었던 것은 옳은 일인가. 일본에게 피해를 주는 '척'을 했지만 정작 피해를 본 사람들은 힘없는 자영업자들이었다. 혐오발언을 멈추라면서? 북한과 중국에 대한 혐오는 안 되고 일본에 대한 혐오는 된다는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일본이 무적권 나쁜 놈이고, 일제강점기만 없었더라면 우리나라가 더 훌륭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그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의 통치 없이 왕정이 지속되었면 지금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나아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몇 가지의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로, 당시의 힘 있는 나라들은 죄다 나쁜 놈이었다. 동아시아 최약체 및 최빈국이었던 조선은 아마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나라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힘없는 서민들의 삶은 왕정과 일제강점기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남의 논에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다. 수탈의 방법이나 정도는 다를 수 있었겠지만, 먹고살기 빡빡한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전라도 지방은 넓은 평야로 인해 소작농의 비율이 타 지역에 비해 높았다. 전라도 지방의 좌경화는 이러한 지리적 요인에 근거한다.)

셋째로, 당시는 뉴스가 잘 보급되던 시기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식당에서 뉴스를 보며 정치를 반찬처럼 씹어댈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을 부양하는 데 급급했고, 간간이 들려오는 주권침탈이니 국모시해니 하는 말들이 그들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극히 미비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알지만, 그들의 목적까지는 알지 못한다. 초기 반일운동가들의 목적은 민주국가의 설립이 아닌 왕정의 복권이었으며, 이후에 벌어지는 반일운동들 또한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애초에 신분이 존재하는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의 패망이 그들에 힘에 의해 이뤄졌다면 '제2의 조선'이 펼쳐졌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일제강점기가 개똥이었다면, 왕정은 닭똥이었다.

민주주의가 시작된 후에도 왕정의 잔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가짜 이강석 사건'이 있고(웹툰 '귀인'을 참고하자. 매우 재밌음.), 군사정권 시절 대통령을 '각하'라고 칭하며 충성을 바쳤던 많은 군인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경호실장이 정보부장에게 '각하가 곧 국가야! 국가 지키는 게 내 일이고.'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 대사만큼은 현실고증이 완벽하지 않나 싶다. 민주주의의 출범 후에도 대통령은 왕과 다름없었고, 관료들은 국가가 아닌 사람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는 좋게 말하면 유교적 관점이고, 나쁘게 말하면 맹목적 충성이다. 이들의 시각에서 본 프랑스혁명은 국민이 폭정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한 기념비적인 사건일까, 아니면 폭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의 목을 친 극악무도한 사건일까.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건만, 우리나라의 권력은 늘 견제받지 않기를 원했다. 과거의 중앙정보부와 최근의 검찰 길들이기는 과정만 다를 뿐, 목적은 동일하다. 우리나라에서 방역이라는 정부의 횡포와 안전성 검증이 부족한 백신의 강요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일개 '백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동적인 백성이 아닌 주체적인 국민으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삶의 결정권을 타인에게 넘기는 순간 삶의 의미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서로를 사랑하기 전의 탕웨이와 양조위를 보라. 집단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개 백성에 불과했으며,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의 결정에는 오직 충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이들을 자유롭게 한다. 탕웨이는 선택의 자유를 얻었고, 양조위를 살리는 결정을 한다. 집단의 뜻과는 달랐음에도, 자신이 죽을 줄 알았음에도 탕웨이는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의연히 받아들인다. 가슴이 이끄는 길에는 후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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